
9월 3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39회에서는 미그-19 전투기를 몰고 귀순한 이웅평 대위의 사건과 그 뒤 이어진 삶이 공개됐다.
라면 봉지 한 장이 만든 체제의 균열
북한 초엘리트 군인이자 공군 대위였던 이웅평은 휴가지 바닷가에서 라면 봉지 한 장을 발견했다. 뒷면에 적힌 ‘유통 과정에서 변질된 제품은 즉시 교환해 드립니다’라는 문구는 그의 상식에 커다란 균열을 일으켰다.
라면 봉지의 문구는 남한에서는 불량품을 소비자가 교환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웅평에게 낯설게 각인시켰다. 북한에서 배워온 남한의 모습과 실제 생활의 단서가 다르다는 점을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였다.
여기에 친척 문제로 아버지가 숙청당하면서 체제에 대한 의문은 개인의 생존 문제로 번졌다. 이웅평은 자신에게도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고 판단했고, 결국 군 조종사라는 신분을 이용해 목숨을 건 탈출을 준비했다.
미그-19 몰고 넘은 1983년 2월 25일
1983년 2월 25일, 당시 29세였던 이웅평은 비행 훈련 도중 편대를 이탈했다. 북한 레이더망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미그-19 전투기를 낮게 몰며 초저공비행으로 남쪽을 향했다.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북한 전투기 때문에 서울과 경기 일대에는 실제 대공 경계경보가 울렸다. 갑작스러운 사이렌에 시민들이 긴장한 가운데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들이 출격해 이웅평이 몰던 전투기를 에워쌌다.
포위된 상황에서 이웅평은 조종간을 좌우로 흔들며 공격 의사가 없고 우리 군의 지시에 따르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후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의 유도를 받아 수원 비행장으로 향했고, 마침내 활주로에 착륙했다.
수원 비행장에 안착한 뒤 캐노피를 연 이웅평은 두 팔을 들고 ‘나 총에 맞지 않게 해주시오. 나 할 말 많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북한의 비밀을 폭로하러 왔다’라며 자신이 알고 있던 북한의 군사 정보를 내놓았다.
정부는 구소련 최첨단 주력 전투기인 미그기를 통째로 확보하고 이웅평이 제공한 북한 군사 기밀의 가치를 인정했다. 그 대가로 당시 고급 아파트 78채를 살 수 있는 15억 6천만 원의 보상금을 지급했고, 이웅평을 대한민국 공군 소령으로 정식 임관시켰다.
‘반공 아이돌’ 뒤 따라붙은 감시
이웅평이 귀순하는 생생한 과정을 들은 청하는 ‘소름 돋는다’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루아침에 국가적 인물이 된 그는 귀순 과정과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역할까지 맡으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받았다.
귀순 이후 이웅평은 한 해 900회가 넘는 안보 강연과 각종 행사 일정을 소화했다. 여의도 광장에는 그를 보기 위해 150만 명에 이르는 인파가 몰렸다고 소개될 만큼 인기가 컸고, 방송에서는 이를 오늘날의 BTS급 인기에 빗대 ‘반공 아이돌’이라고 설명했다.
대통령보다 바쁜 인물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화려한 생활과 ‘은수저’ 같은 삶이 이어졌지만 자유에는 다른 대가도 따랐다. 암살 가능성과 독극물 테러에 대한 두려움이 끊이지 않았고, 안전을 이유로 생활 공간과 일상에도 국가 기관의 감시가 따라붙었다.
그러던 중 이웅평은 과외 교수의 딸 박선영 씨를 만나 첫눈에 반했고 두 사람은 결혼했다. 부부는 안전을 위해 공군 관사에서 신혼 생활을 했지만, 집 안에서 길게 연결된 도청 장치가 발견되면서 감시가 실제 생활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마주했다.
박선영 씨는 도청 장치를 직접 뜯어낸 뒤 보안사령관을 찾아가 항의했다. 감시가 계속된다면 함께 살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까지 보인 끝에 부부는 비로소 일상적인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김만철 일가 귀순 이끈 비밀 특사
풍요로운 생활을 얻은 뒤에도 이웅평은 자신의 정착에만 머물지 않았다. 북한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남한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는 일에 나섰고, 자신이 먼저 경험한 생활을 다른 귀순자들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자처했다.
1987년 함경북도 청진 의과대학 의사 김만철 씨 일가 11명이 일본 해역에서 표류한 끝에 대만으로 이송되자 정부는 이웅평을 비밀 특사로 현지에 급파했다. 그는 김만철 씨와 가족들을 직접 설득해 대한민국 귀순을 이끌어냈다.
그 뒤에도 귀순 군인들은 물론 전향을 고민하는 간첩까지 집으로 초대해 자신의 생활을 숨김없이 보여줬다. 낯선 체제에 대한 불안을 줄이고 실제 남한의 일상을 확인시키면서 새로운 삶을 선택하도록 돕기 위한 행동이었다.
나아가 이웅평은 북한의 동포들과 군인들이 자유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계절마다 가족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대북 전단에 실려 북으로 보내졌고, 이 이야기를 들은 윤유선은 ‘굉장히 용감하다’라며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마음에 감탄했다.
15억 6천만 원 남기고 떠난 48세
그러나 1997년 간경화로 시한부 판정을 받으면서 이웅평은 다시 죽음의 사선 앞에 섰다. 아내의 혼신의 노력 끝에 당시 국내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웠던 간이식 수술의 기회를 얻었지만, 수술을 앞두고 ‘통일을 못 봤다’라며 깊은 아쉬움을 내비쳤다.
간이식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건강을 되찾는 듯했다. 하지만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던 누나를 비롯해 고향에 남은 가족들의 비극적인 소식을 접하면서 자신이 귀순한 탓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가족을 향한 마음은 귀순 당시 받은 거액의 보상금에도 그대로 남았다. 이웅평은 15억 6천만 원을 한 푼도 쓰지 않고 통일 뒤 북한 가족들을 위해 남겨뒀으며, 남한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도 고향에 남은 가족을 마음에서 놓지 못했다.
결국 건강이 다시 악화된 이웅평은 병원으로 이송됐고 2002년 5월 4일 향년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윤유선은 그의 마지막을 듣고 ‘너무 허망한 죽음’이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방송 말미 아내 박선영 씨는 ‘그가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과 울림을 주는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라는 소회를 전했다. 이 말은 귀순 영웅이나 ‘반공 아이돌’이라는 수식어 뒤에 있던 한 사람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했다.
방송이 끝난 뒤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이웅평의 삶이 너무 안타까워서 눈물 흘리면서 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했다는 게 마음 아프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또 ‘이웅평과 아내의 러브스토리도 한 편의 영화 같아’, ‘자유란 쉽게 얻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얻기 힘든 것’, ‘미그기 몰고 탈북한 용기가 대단하다’는 반응도 나왔다. 귀순 사건과 그 이후 19년의 삶 모두가 시청자들에게 긴 여운을 남겼다.
아내 박선영 씨의 마지막 바람과 방송 뒤 시청자 반응은 이웅평의 귀순을 한순간의 영웅담이 아니라 자유를 선택한 뒤 감당한 19년의 삶으로 돌아보게 했다. 북에 남은 가족을 끝까지 그리워하며 보상금까지 남겨둔 그의 삶에서 가장 오래 남은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사진 : SB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