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추적자 설록 4회 장항준, 알리에노르·루이 7세 파경에 이혼 토론

시간추적자 설록 4회 장항준, 알리에노르·루이 7세 파경에 이혼 토론

8월 4일 방송되는 ‘시간추적자 설록’ 4회에서는 장항준과 봉태규, 신아영, 썬킴이 크리에이터 백진경, 역사학자 임승휘, 이혼 전문 변호사 양나래와 함께 아키텐의 여공작 알리에노르와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결혼과 파경을 추적한다.

아키텐의 상속녀와 프랑스 왕위 계승자의 결혼

아키텐의 상속녀와 프랑스 왕위 계승자의 결혼

알리에노르는 당시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넓고 부유한 영지인 아키텐을 물려받은 상속녀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1137년 프랑스 왕실의 보호 아래 놓인 그는 왕위 계승자였던 루이와 결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왕비가 됐다.

두 사람의 결혼은 한 남녀의 결합을 넘어 아키텐과 프랑스 왕실의 관계를 결정하는 정치적 선택이었다. 프로그램에서는 결혼 전에 작성된 약정을 혼전 계약서의 관점에서 살펴보며, 결혼이 끝날 경우 막대한 영지의 권리가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추적한다.

역사 자료에 따르면 아키텐은 결혼과 동시에 프랑스 왕실에 완전히 귀속되는 영지가 아니었다. 알리에노르가 낳은 아들이 성장한 뒤 아키텐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루이 7세도 결혼만으로 모든 권리를 확보할 수는 없었다.

장항준은 막대한 재산과 복잡한 권리가 걸린 약정 내용을 확인한 뒤 “부자들은 무서워서 이혼 못 할 것 같아”라고 반응한다. 감정이 끝났다고 곧바로 관계를 정리할 수 없는 왕실 결혼의 조건을 오늘날 부부의 재산 분쟁과 비교한다.

루이 7세와 알리에노르는 문화와 생활 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수도원 교육을 받으며 검소하고 종교적인 생활에 익숙했던 루이와, 시와 음악이 발달한 아키텐 궁정에서 성장한 알리에노르는 결혼 생활을 바라보는 태도부터 달랐다.

알리에노르가 유지하려 했던 화려한 궁정 문화와 독립적인 행동이 공개되자 장항준은 자신이 신랑이었다면 결혼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 같다고 말한다. 양나래는 현대의 이혼 사건과 중세 왕실의 혼인 해소가 어떤 부분에서 다르게 작동하는지 법률가의 시선으로 살펴볼 예정이다.

십자군 원정에서 갈라진 알리에노르와 루이 7세

십자군 원정에서 갈라진 알리에노르와 루이 7세

두 사람의 갈등은 제2차 십자군 원정에서 더욱 커졌다. 알리에노르는 자신의 영지에서 출발한 병력과 함께 원정에 참여했고, 루이 7세와 긴 이동 끝에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알리에노르의 친가 쪽 삼촌이자 안티오키아의 통치자였던 레몽 드 푸아티에가 있었다. 레몽은 알레포를 공격해 주변의 군사적 위협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루이 7세는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는 종교적 순례를 우선했다.

알리에노르는 군사적으로 레몽의 계획이 더 현실적이라고 판단해 그의 편을 들었다. 세 사람이 같은 원정을 두고 다른 결론을 내리면서 부부의 갈등도 군사 전략과 권력 문제로 확대됐다.

레몽은 외모와 언변, 지도력까지 갖춘 인물로 소개된다. 장항준은 자신보다 외모와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등장한 상황에서 아내까지 자신의 편을 들지 않는다면 참기 어려울 것 같다며 루이 7세의 입장에서 의견을 내놓는다.

당시 연대기에는 알리에노르와 레몽이 지나치게 가까웠다는 주장도 남아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실제로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알리에노르가 레몽의 군사 전략을 지지한 정치적 행동이 사적인 관계로 과장됐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갈등이 깊어지자 알리에노르는 루이 7세에게 두 사람의 근친 관계를 근거로 결혼을 무효로 해달라고 요구했다. 루이 7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알리에노르가 안티오키아에 남겠다는 뜻을 밝혔는데도 그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신아영은 질투와 권력을 이유로 상대의 선택을 억누른 행동을 현대의 부부 관계에 대입한다. 그는 단순히 이혼으로 끝낼 사안이 아니라 형사 처벌까지 생각해야 한다며 루이 7세의 행동에 강한 의견을 내놓는다.

백진경은 영국에서 생활하며 접한 왕실 문화와 부부 관계의 관점으로 이야기에 참여한다. 임승휘는 당시 연대기가 여성 권력자의 행동을 기록한 방식과 후대에 불륜설이 확대된 과정을 역사학자의 시선에서 구분할 예정이다.

혼인 무효 뒤 잉글랜드 왕비가 된 알리에노르

혼인 무효 뒤 잉글랜드 왕비가 된 알리에노르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끝난 뒤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1152년 교회 회의는 두 사람이 가까운 혈족이라는 이유를 들어 혼인을 무효로 처리했고, 두 딸은 루이 7세의 곁에 남았다.

알리에노르는 왕비의 지위를 내려놓았지만 아키텐의 권리는 되찾았다. 결혼 전부터 자신이 상속한 영지였기 때문에 혼인이 끝난 뒤에도 넓은 영토와 통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파경보다 더 큰 충격을 준 것은 알리에노르의 다음 선택이었다. 그는 혼인 무효가 결정된 지 약 8주 뒤 자신보다 아홉 살 어린 노르망디 공작이자 앙주 백작인 헨리 플랜태저넷과 결혼했다.

헨리는 노르망디와 앙주를 보유한 데 이어 알리에노르와의 결혼으로 아키텐까지 연결했다. 1154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가 되면서 알리에노르는 프랑스 왕비에서 잉글랜드 왕비로 자리를 옮겼다.

루이 7세에게 전처의 재혼은 개인적인 상실을 넘어 정치적 위기였다. 프랑스 왕의 봉신이었던 헨리가 프랑스 왕실보다 넓은 영토를 지배하는 상황이 만들어졌고, 아키텐까지 포함된 세력은 루이의 왕권을 직접 압박했다.

루이 7세는 헨리가 자신의 허락 없이 알리에노르와 결혼했다는 점을 문제 삼아 전쟁에 나섰다. 즉각적인 군사 행동은 큰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두 왕실의 영토 경쟁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더욱 예상하기 어려운 반격이 이어졌다. 헨리 2세의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자 루이 7세가 이들을 지원하면서 알리에노르의 두 번째 가족 안에서 벌어진 갈등에 개입했다.

알리에노르도 아들들의 반란을 지지한 것으로 전해지며 헨리 2세에게 붙잡혀 장기간 갇히게 된다. 루이 7세와의 결혼에서 시작된 권력 관계가 새 남편과 자녀들의 왕위 다툼까지 이어진 셈이다.

MC들은 평범한 부부의 파경처럼 시작된 이야기가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영토 경쟁, 부모와 자녀의 반란으로 확대되는 전개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알리에노르의 재혼과 루이 7세의 반격은 한 번의 이혼이 중세 유럽의 권력 지도를 얼마나 크게 바꿀 수 있는지 보여줄까?

알리에노르와 루이 7세의 결혼 파탄과 헨리 2세를 둘러싼 왕실의 반격은 8월 4일 화요일 오후 10시 30분 K-STAR·SBS Plus·코미디TV·더라이프·GTV에서 방송되는 ‘시간추적자 설록’ 4회에서 공개된다.

사진 : SBS Plus ‘시간추적자 설록’